Drama, "나, 다니엘블레이크"

행정절차 속 지워진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



영화는 사회적 약자를 두 부류로 분류하는 영국사회를 그려낸다. ‘질병수당을 받는 자’와 ‘구직수당을 받는 자’. 이 기준은 각각의 세계를 구성한다. 둘 중 어느 세계라도 속하기 위해선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영화의 시작, 다니엘과 질병수당 상담원과의 통화 역시 그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심사과정이었다.

다니엘이 일할 수 없게 된 건 심장병 때문이다. ‘팔다리가 멀쩡한지’ 묻는 질문은 그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다니엘에게 상담원은 권력을 휘두른다. 결국 다니엘은 12점을 받고 질병수당에서 낙오된다. 당장 돈이 없는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직수당을 받기로 한다.



일할 수 없는 몸으로 일자리를 얻기 위한 구직활동을 시작하는 아이러니가 시작된다. 그리고 구직수당 상담을 받으러 간 곳에서 케이트를 만난다. 케이트는 몇 분 지각했다는 이유로 구직수당을 받지 못하게 된 처지였다. 경비원은 항의하는 케이트를 짐짝처럼 쫓아낸다.



[국가가 국민을 품지 못할 때, 연대의 손을 내미는 이웃]



케이트가 식료품지원센터에서 본능적으로 통조림 캔을 열어 먹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이성적 사고 밖으로 삐져나온 본능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직면한 케이트는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고, 그런 그를 다니엘과 직원이 위로한다.


인간의 5대 욕구 중, 생리적 욕구는 가장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애정과 존경, 자아실현의 욕구 모두 생리적 욕구가 충족됐을 때에야 추구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의식주가 보장돼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인간의 존엄성이란 ‘가치’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노력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몸이 아프고 장애가 있는 등의 이유로 일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국가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의 삶이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쿠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영화 속 영국 사회는 쿠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낙오된 이의 아픔을 대신 함께 짊어지는 존재는 이웃이다. 국가가 국민을 품지 못할 때 연대의 손을 내미는 이웃의 존재가 어찌나 소중한지. 다니엘이 케이트에게, 케이트가 다니엘에게 그랬듯.



[행정절차 속 지워진 개인의 이름을 찾아간다]


“그렇게 일하고 싶으시면 이력서를 쓰세요.”

심장병으로 일할 수 없는 다니엘에게 상담사가 한 말이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이력서를 강의를 듣고 구직활동에 나선다.

시스템 속 개인은 이름을 잃는다. 시스템은 개인을 ‘일할 수 있는 자’와 ‘일할 수 없는 자’로 거칠게 분류한다. ‘일할 수 없는 자’에겐 게으르다는 꼬리표까지 따라붙는다. 일할 수 없는 이들의 다양한 사연은 납작하게 뭉개진다. 시스템 속 개인은 뭉뚱그려져 납작한 존재일 뿐이다.



다니엘은 그런 시스템에 저항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그가 원래 법정에서 하려던 말은 유언이 되었다. 냉혹한 시스템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식으로 저항했다. 영화의 제목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 다니엘블레이크>는 행정절차 속 지워진 개인의 이름을 찾아가는 영화다.



영국의 복지가 개인을 조금만 더 품어줬다면, 그가 항소를 앞두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결국 <나, 다니엘블레이크>는 ‘복지병’에 열광하는 신자유주의에 질문한다.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본 영화는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December 8, 2020

Editor 이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