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ma, "피아니스트"

지배하지도, 지배받지도 못한 여자의 이야기


[메마르고 삭막하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삭막한 데가 있다. 영화의 원작 <피아노 치는 여자> 역시 그렇다.

작가 엘프리데 옐리니크는 주인공 에리카와 월터를 극도로 객관적으로 그려낸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에리카는 불친절함을 더한다. 무표정 속의 미묘한 감정을 읽어내고 그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추측해야 한다. 인물들의 감정들이 다소 메마르게 비춰진다.


[젊음에 대한 질투.열등감 - 빼앗긴 여성성, 젊음]

“그 원피스는 너무 천박해. 네 나이에 뭐가 어울리는지 알아야지. 너 같은 신분의 사람이 화장이나 떡칠하고.”



에리카는 어머니로부터 여러 가지 정체성을 주입당했다. 남편의 대리인, 예술가가 그것이다. 성인여성이 된 에리카가 갖는 당연한 욕구들은 무참히 거세되었고, 결국 에리카는 ‘젊음’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만다. 강제적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여성’이 된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젊음과 여성성은 젊음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을 낳는다. 앞서 학생의 코트에 유리조각을 넣어 다치게 한 것도 비뚤어진 질투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슈베르트는 네 전공이잖니. 아무도 너보다 뛰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이지. 조심하거라”

딸의 꿈과 미래까지 정해주는 어머니의 모습은 ‘헬리콥터 부모’를 연상케한다.



당연히 성적욕구 또한 통제되었다. 어머니는 남성의 방문을 극도로 경계한다. 자신의 ‘남편’이자 ‘외동딸’인 에리카의 삶을 낯선 남성이 두드리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서른여섯씩이나 된 딸을 여전히 혼자 소유하려는 집착을 부끄러워하지조차 않는다. 에리카에겐 “여기다 매춘굴을 세우지 그러니”라는 심한말까지 퍼붓는다.

에리카의 거세된 욕구는 비뚤어진 욕망으로 발현됐다. 사도마조히즘적 성적 취향을 보이는 것보다도, 일반적인 성행위로선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 더 위험하다. 동시에 안쓰럽다. 보편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 것 같아서다.

결국 에리카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성적 쾌락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남성의 정액이 묻은 휴지, 성관계중인 커플, 꽁꽁 묶인 채로 맞는 ‘자극’없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머니로 인해 고립된 에리카의 세계는 그런 성적취향으로 더욱 고립된다. ‘아무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회의감과 억눌러진 욕망의 찌꺼기가 그를 괴롭힌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 클레머에게 취향을 노출시켰던 건, 자신을 노출하고 노출된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싶다는 심리 때문이기도 하다.


[온전히 지배하지도, 온전히 지배받지도 못하는 에리카]



클레머는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고 자신을 지배하려드는 에리카에게 복수심을 품는다. 화장실에서조차 그 공간과 에리카를 지배하는 자가 되길 원한다. 에리카보다 10살이나 어린 학생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른여섯이라는 에리카의 나이를 약점으로 보고 그를 유혹하기 쉬운 대상으로 평가한다.

에리카는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대상’으로 클레머를 이용하고자 했다. “널 기다렸어. 알아?”라는 말이 그 심정을 대변한다. 동시에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억압을 끊어내고 클레머에게 사랑받고 싶어했다. 그 모순 때문이었을까, 혹은 에리카가 여성이라서였을까. 에리카는 결코 클레머를 ‘대상화’할 수 없었다. 클레머는 혹독하고 잔인하게 에리카를 밀어붙였고 성적으로 학대했다.



에리카가 안쓰러운 진짜 이유는, 그가 완벽한 마조히즘 성향을 지닌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조히즘적 에리카의 성향은 ‘여성’이라는 성별을 만나 더욱 강화된다. 그녀의 성적 취향은 공급받지 못한 애정과 뒤섞였다. 온전히 지배하는 자가 되지도, 지배받는 자가 되지도 못한다. 그렇게 에리카가 행복할 수 있는 길들은 좁아져간다.

영화는 복수를 위해 칼을 가져온 에리카가 자신의 어깨를 찌르는 것으로 끝난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지나치는 클레머의 모습이 서늘하기까지 하다.



에리카는 결국 자신을 ‘불구자’로 만든 존재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친 어깨를 이끌고 향하는 집으로 향한다. 어머니의 집착을 미워하면서도 그를 떠나는 걸 두려워한다. 평생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기에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가 꺾인 상태와 유사하다.



만약, 에리카가 왜곡된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월터와 평범하게 잘 될 수 있었을까. 작가에게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다. 엘리네크에게 ‘행복한 버전’의 에리카를 그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가정에서 억압을 당한 여성도, 온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줬으면 한다. 그게 남성과의 관계든, 아니면 자신과의 관계이든.



*해당 영화는 <왓챠>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October 7, 2020

Editor 이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