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동, “55라이트”

단순함 속에 가려진 깊이감


평상시 행동이나 말투가 가벼운 사람을 멀리한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그 사람의 인성과 진심이 의심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데 있어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객관적인 지표들은 결국 우리의 주관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겉모습은 늘 중요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커피 또한 산미가 있거나 라이트한 맛을 그리 즐겨 하지 않는다. 묵직하고 다크한 느낌을 선호하는데, 얼마 전 오랜만에 내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만나 한껏 들떴다

합정과 망원의 중간지점인 낯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망원시장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고 그렇다고 합정역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이곳저곳 카페 투어를 즐겨 다니며 망원동 또한 몇 번 오가긴 했었는데 이 골목은 처음이었다. 지도를 보며 목적지에 거의 다다를 때쯤, '55라이트'를 알리는 간판 대신 조그마한 사다리가 우릴 반기었다. 힙한 느낌의 테이프로 몸단장을 하고 있던 사다리 위에 곱게 놓여진 꽃. 그리고 큰 창 너머로 다양한 드리퍼들이 보였다.

55라이트는 영단어 oolite(어란석)에서 비롯됐다. 카페 대표메뉴는 베이비크림라떼와 투밀크플랫화이트 그리고 2~4주 간격으로 새로 라인업 되는 필터브루가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심플하고 힙한 느낌이 확 와닿았고, 한적한 오솔길처럼 길게 늘어진 브루잉바에는 각종 드리퍼들과 원두 그리고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었다. 특색 있는 바와 더불어 55라이트의 3면창 또한 굉장히 매력적이다. 앉은 자리에서 바깥의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점은 머무는 이들에게 소소한 기쁨이 아닐까 싶다.

수제청을 담가 만든 에이드뿐만 아니라 디저트도 전부 핸드메이드다. 크랜베리와 캐슈넛이 박힌 베리슈넛 쿠키스콘과 초코 쿠키 스콘 그리고 스모어 쿠키가 있다.

우리는 베이비크림라떼와 패션후르츠에이드, 스모어 쿠키를 주문했다. 이제껏 많은 크림라떼를 마셔왔지만 55라이트의 크림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사장님께선 스푼으로 크림을 먼저 가볍게 떠먹은 후, 라떼와 함께 마시기를 권장하셨지만 크림이 정말 맛있어 한동안 계속 떠먹기만 했다.

크림이 이토록 맛있으니, 커피도 단연 맛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라떼 또한 굉장히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개인적으로 생크림이 올라간 커피 메뉴의 경우 산미 있는 에스프레소보단 고소한 느낌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마셨던 커피들은 다 산미가 어느 정도 베이스로 깔려있어 좀 아쉬웠다. 그러나 베이비크림라떼의 경우, 말 그대로 'BABY'들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부드러움이 가득 담긴 행복한 맛이었다

그것과 더불어 놀라웠던 건, 에이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패션후르츠에이드에 더 손이 갔다. 신맛이 강한 과일이나 음료를 잘 못 마시기 때문에 늘 피해왔었는데, 신맛보단 달콤하고 청량한 맛이 강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던, 한여름의 더위같이 쨍하고 강력한 맛이었다. 일행과 나는 '맛있다'를 계속 연발하며 앉은 자리에서 기분 좋게 금세 해치웠다.

그에 반해 스모어쿠키는 평범했다. 사실 55라이트에서 스모어쿠키를 처음 먹어보는 것이기도 했고 어떤 맛일까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다. 크래커는 평범했고 초코칩과 마시멜로는 달았다. 뜨거운 상태로 서빙되는 것 같았으나 차게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인테리어는 감감적이면서도 굉장히 단순했다. 두 여사장님의 안목치고는 굉장히 무난했으나 손님들을 대하는 사장님들의 태도와 말투 그리고 커피의 맛에선 단순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하나 세심하고 친절했으며 커피 맛 또한 평범과 심플과는 거리가 멀었다. 좌석수는 많지 않았고 의자와 테이블 모두 오래 앉아있을 수 있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한편, 힙한 느낌답게 음악 또한 공간을 꽉 쥐고 있었다. Melissa Polinar의 발랄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음악에 어깨를 약간 들썩이기도 했다.

음료 쿠폰 또한 특이했다. 도장이나 적립식이 아닌 손님이 직접 펀칭해서 뚫는 방식으로, 모양이 꼭 oolite(어란석) 같았다. 힘을 제법 써야 링이 고정되어 처음엔 애를 먹었는데, 이 또한 웃음이 나오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방문한 곳의 커피가 맛있거나 사장님이 무척 친절했다거나 또는 나 자신이 그 공간에 기분 좋게 머물었을 때, 매장을 나오기 전 음료 한 잔을 더 테이크 아웃 하는 편이다. 55라이트는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돼 다음 장소로 이동 전 플랫화이트를 테이크아웃했다.

굳이 기대하지 않고 마셔도 맛있고, 두번째 맛에선 괜히 또 기대하게 되는 맛. 묵직하고 깊은 맛이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일명 '티키타카'가 잘 되는 사람과 함께면 괜스레 웃음이 나고 기분이 좋다.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나게 되는 일 또한 내 편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으로, 이 또한 나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오롯이 '나'를 위한 커피와 그 맛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 사실 커피의 맛이 어떻든 간에 커피 한 잔에 가벼움이란 없다.


55라이트

서울 마포구 희우정로 58 1층

0507-1339-1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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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4, 2020

Editor 정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