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 “아니스”

무료한 오후, 서유럽 감성의 케이크 한 조각


깊어가는 가을과 한 걸음 더 가까이 마중 나온 추위에 올 2월 낯선 도시를 배회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짙은 빨강의 이층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런던의 이곳저곳을 누볐던 기억과 낯선 이들의 걸음을 따라 이국적인 도시의 아름다움에 취해 물들었던 날들. 사진첩을 뒤적거리다 이내 이전의 장면들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때, 나는 온몸의 세포를 일깨우는 추위를 껴안고 런던의 카페를 찾아다녔다. 많고 많은 동네 중 마음에 들었던 해크니 지역. 밤 사이 소복이 쌓인 눈의 고요함을 닮은 동네였다. 넓은 공원이 있고, 학교가 있고, 아기자기한 상점이 즐비해 있던 곳. 어찌나 조용하던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흐르는 노래가 소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서걱서걱 발걸음을 옮겨 도착했던 ‘violet’. 런던의 유명 베이커리 숍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른 편에 넓게 보이던 메뉴판. 초록의 정사각형 칠판에 음료와 식사 메뉴를 적어 놓은 그 메뉴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옥수동 아니스의 메뉴판을 처음 보았을 때, violet 카페가 떠올랐다. 적색 조명이 달린 내부를 보니 ‘monocle’ 카페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전체적으로 유럽 카페 이미지가 떠올랐던 곳이었다.

잠시 머물 카페를 위해 옥수동을 방문하기는 처음이다. 오밀조밀한 어여쁜 외관의 카페가 즐비한 연남동이나 해방촌, 삼청동이 아닌 옥수동에 이런 카페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부푼 기대감을 안고 먼 거리를 달려왔다.

한 가지 소소한 팁은,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옥수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 걸 추천한다. 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와도 되지만 언덕 경사도 제법 높고 그 거리도 길어 몇몇 이들의 설움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날은 출구로 나오자마자 마주한 버스에 달갑게 몸을 실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쇼케이스에 진열된 어여쁜 자태의 케이크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매장 안에선 달달한 시나몬 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유명한 당근 케이크와 아이스라떼를 주문하고 곳곳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내부 좌석은 2인석 3개와 4인석 한 개, 그리고 테라스 좌석이 있다. 케이크에 집중하는 만큼, 커피 메뉴는 간단하다. 아메리카노부터 카페모카까지. 논커피 음료로는 핫초코와 티가 있다.



자리에 앉아 당근 케이크를 처음 먹었을 때를 생각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로 힘들어했던 시절과 사랑하는 이들과 멀어졌던 시절, 그 우울 속에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디저트가 바로 당근 케이크였다. 연필심 만한 당근이 씹히고 반가운 견과와 함께 시나몬 향이 짙게 퍼지다가 마침내 혀끝을 건드리는 달콤한 크림치즈. 한동안 당근케이크의 매력에 반해 카페에 가면 무조건 커피와 함께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예전보다 먹는 횟수가 줄었다. 그 당시의 힘든 상황이 떠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세상엔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당근 케이크는 시나몬 향과 견과류 토핑의 과다로 자칫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될 수 있다. 또, 시트 위를 책임지는 크림치즈나 생크림의 맛도 중요한데, 개인적으로는 크림치즈 특유의 새콤한 맛 때문에 당근 케이크에 크림치즈가 많이 올라간 것을 별로 선호하진 않는다. 그러나 아니스의 당근 케이크는 나의 오만함을 깨뜨렸다. 포크로 한 스푼 부드럽게 떠 맛보니 견과류가 박힌 시트와 크림치즈, 시나몬의 향이 단번에 느껴졌다. 무엇보다 크림치즈 특유의 새콤함이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묵직하고 단단한 생크림을 떠먹는 듯하여 그 맛이 좋았다. 혹시나 해서 생크림도 첨가하시는지 여쭈니 생크림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케이크가 워낙 맛있어 커피 맛은 기대하지 않았다. 디저트가 맛있으니 커피는 그저 목축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 외로 고소한 라떼 맛에 흠칫 놀랐다.



자리에 앉아 케이크를 먹는 틈틈이 주방에서 나오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는, 어떤 디저트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을 갖게 했다. 매장의 조명이 아늑하고 좌석도 편안해 좋은 기분으로 머물렀다. 무엇보다 창문 밖의 비스듬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이따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힐링이 되었다.



맛에 대한 평판이 좋아 아니스에서는 홀케이크 주문이 끊이질 않는데, 구움색이 좋은 쿠키들과 구움과자는 소중한 지인들에게 마음을 전하기 좋다. 또 번잡한 도로가 아닌 아파트 단지 근처에 위치해 있어 조용한 오후를 보내기도 안성맞춤이다. 우연히 잠시 들러 내 시간의 일부를 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에 할애하고 싶을 때, 아니스의 케이크는 그 자체로 최고의 시간을 선물할 것이다.





아니스

서울 성동구 독서당로 160

02-2299-2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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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5, 2020

Editor 정채영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