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로즈 와일리展”

86세 할머니 화가, 그녀가 사랑한 일상들


혼자서도 이곳저곳을 잘 돌아다니는 나지만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혼자 관람하는 일은 유독 어려웠다. 늘 인산인해 한 미술관을 홀로 조용히 감상하기는 어려울뿐더러 왠지 모르게 좀 쑥스러웠다. 그러던 중 작년 겨울, 난생처음 홀로 테이트 모던의 전시를 관람했다.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있는 것도 좋았고 오디오 가이드의 나긋한 설명과 함께 여러 각도로 보며 생각하는 일이 즐거웠다.



최근 정말 보고 싶은 전시가 있어 오랜만에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는 남과 함께 하기보단 혼자를 선호하는 편이라 이번 전시도 나 혼자 조용히 관람하고 싶었다. 토요일 오후, 한가람 미술관을 찾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내부에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발열 체크를 끝내고 들어간 전시장은 생각보다 넓었다. 이번 전시에는 영국 작가 로즈 와일리의 작품 130여 점을 볼 수 있는데 그중에는 테이트 모던의 VIP들만 관람할 수 있는 작품들도 있었다.



로즈 와일리는 1934년 영국 켄트에서 태어난, 86세의 고령 화가다. 그녀의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붓 터치는 다채로운 색감과 더불어 보는 이들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하는 귀여운 그림들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그녀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전시는 크게 9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보통의 시간들‘ 이라는 제목으로, 로즈 와일리가 사랑한 일상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작품은 ‘팬지의 여왕 Queen of Pansies(Dots), 2016’이다.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의 색감에 사로잡힌 로즈는 이를 자신의 작품에 재현했고 원작 초상화의 의상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작품에 팬지꽃들을 추가했다.



두 번째는 ‘필름 노트‘다. 영화광인 로즈 와일리는 영화 속 한 장면을 그녀의 방식대로 재해석해 새롭게 풀어낸다. 대표작인 ‘Sitting on a Bench with Border(Film Notes) 2008’은 많은 이들의 SNS에 올라와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 외에도 칸 영화제에 참석한 배우 니콜 키드먼을 본 후 그린 ‘Nicole Kidman NK(Syracuse Line-Up), 2014’는 등이 그대로 드러난 빨간색 드레스가 포인트다. 넓은 캔버스에 풀어낸 작품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삽입된 그녀의 드로잉은 흰 종이에 마치 색연필로 장난치듯 표현해 매력적이면서도 귀엽다. 빨강, 초록, 보라, 파랑 등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감과 귀여운 레터링이 가미된 작품들로 전시장은 화기애애했고, 사진촬영이 가능해 많은 이들이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테이트 모던의 VIP 룸에 전시된 그녀의 회화, 드로잉, 조각 작품은 사진촬영이 불가능했다. 개인적으로 로즈 와일리의 모든 작품 중, 이 공간에 소개된 작품들이 가장 좋았지만 사진 촬영이 불가능해 꽤 아쉬웠다. 한편 그녀의 작품에는 대게 팔이 없고 길게 뻗은 다리가 인상적인 여러 명의 여자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영국 BBC의 토크쇼 <그레이엄 노튼 쇼>의 오프닝 그래픽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대중성은 그녀의 큰 강점 중 하나로, 역사 속 이야기, 뉴스와 광고에서 받은 영감을 캔버스에 솔직하게 풀어냈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작품은 ‘노래하는 북한 어린이들 Korean Children Singing, 2013’이다. 이는 북한 어린이들이 교복을 입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영국 신문에 실린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과 머리 모양,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그들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작품 귀퉁이에 연필로 짧은 글귀를 적음으로써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눈길을 끌었던 ‘빛 속의 소녀 Girl in Lights, 2015’는 붓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그린 작품으로, 미국 잡지에 실린 모델 케이트 모스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9개의 카테고리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주제는 살아있는 생명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고양이, 나무, 꽃 등을 사랑했으며 이러한 자연물들을 그녀만의 생명체로 재탄생시켰다. 

이번 전시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점이 또 있다. 바로 그녀가 그린 손흥민이다. 실제로 손흥민 선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그녀와 짧은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이는 전시장 벽에 큰 스크린 화면으로 띄워준다. 그녀는 축구를 사랑한 남편의 영향을 받아 리버풀, 첼시, 아스널 등 여러 팀들을 좋아하게 돼 그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중 토트넘 소속 손흥민 선수의 액티브한 순간들은 2020년에 완성한 최신작이다.


 

이 외에도 톤온톤 컬러감이 돋보이는 소녀와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과 캔버스나 종이가 아닌 시각적인 언어를 고스란히 담은 조각품들 그리고 수년간 그녀의 작업실을 드나들었던 권순학 작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로즈 와일리의 아틀리에까지. 눈이 즐거워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에 부담 없는 전시다. 다만,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전시를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그녀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 전시 후 그녀의 도록을 구매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도록을 천천히 읽은 후 더 자세히 보고 싶었던 작품들을 카메라에 담아내지 못해 후회했다. 



전시장을 나오면 그녀의 작품이 새겨진 엽서, 에코백, 에어팟 케이스, 노트 등의 여러 굿즈들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을 구경하는 것이야말로 미술관의 또 다른 묘미가 아니겠는가. 전시장을 유유히 빠져나오며 테이트 모던과 퐁피듀 센터에서 유유히 홀로 걸었던 때를 떠올렸다. 거리 두기가 완화돼 카페 내에서도 취식이 가능하다고 하니 아기자기한 로즈 와일리의 작품들을 보며 힐링한 후, 1층 테라로사에서의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겠다. 





로즈 와일리展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02-733-2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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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2, 2021

Editor 정채영  instagram